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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9.9 지리 가기 1( 좌고대.영신봉 일몰)

말발도리 2023. 9. 10. 00:26

*2023.9.9 아침 작은 추위를 느낌

♧좌고대. 영신봉 일몰♧
(경남 산청군 시천면) 거림ㅡ세석대피소 ㅡ좌고대 ㅡ영신봉 ㅡ 대피소 1박ㅡㅡㅡ5시간

오랜만에 취사도구에 카메라까지 챙겨 나섰다
20일 전 2박 3일 때보다 보태기 된 취사도구 무게는 견딜만했다.
코스도 제일 난이도를 적게 했으니 잘 해내리라  그리고 분명 즐기게 되리라ㅎㅎㅇ.
결국 맘먹고 찾아 나선 좌고대는  끝까지 오르지 못했다 살짝 손가락의 작은 도움이라도 있어야  가능했다 .
일몰 맞이 시간이 늦어져 숨 가쁘게 영신봉을 향했다.
거림골 지리남부 능선을 조망하면서 말 섞은 진사님이 벌써 영신봉 최고의 포토존에 자리하고 있었다.
영신봉 운해는 최고의 선물이었다.
아마 그만둔다는 카메라를 몇 번은 더 가져올 것 같다.
이곳 세석으로.


*덕산택시

ㅡ거림에서 중산 진주행
오후 4시20분,   7시

*기타
덕상의 금성식당의  칼치조림과 삼겹살도 ㅡ주민추천





    *거림골

지리산서 첫 겨울 맞은 ‘이태’
토벌대 피해가며 굶주림 견뎌
이듬해 봄 투항하듯 붙잡혀

경남 산청군 시천면 곡점으로 향했다. 이곳은 1950년 6.25동란 발발 이듬해 여름,
빨치산이라 불리는 조선인민유격대 남부군이 지리산으로 들어오는 길목이었고, 남부군 소속의 이태(李泰)가 치열하고도 처절했던 산중생활을 마감하고 ‘인간이 사는 세계’로 귀환한 곳이기도 하다.

이태는 6.25동란이 발발하자 조선중앙통신사 전주지사의 기자로 있다가, 북한군이 후퇴하기 시작하는 1950년 9월 말 즈음 조선노동당 전북도당사령부가 있는 회문산(전북 순창군, 임실군)에서 빨치산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그리고 전북도당사령부는 1951년 3월 토벌대의 집중 공세를 피해 동쪽으로 이동하여 금남호남정맥의 성수산, 팔공산, 장안산을 거쳐, 백두대간 산줄기인 백운산, 육십령, 덕유산 방면에 머문다. 이때 이태는 당시 빨치산들에게 창궐하던 재귀열(발진티푸스)에 걸려 백운산의 ‘환자 트’(아지트의 준말)에서 생활하다가, 1951년 6월 10일 남한 빨치산 총사령관 이현상 휘하의 ‘상승부대’, 즉 조선인민유격대 남부군 ‘승리사단‘으로의 전속명령을 받는다. 남부군은 남덕유산과 백운산에 머물다가 함양 안의면, 산청 생초면을 거쳐 1951년 8월 10일 황매산으로 이동한 후, 드디어 지리산으로 들어오게 된다. 남부군이 지리산으로 들어오는 과정은 이태의 수기 ‘남부군’에 다음과 같이 묘사되고 있다.

‘앞서 가던 문춘 참모가 걸음을 멈추고 한참 정면을 바라보고 있더니 뒤를 돌아다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동무들! 저기가 달뜨기요. 이제 우리는 지리산에 당도한 거요!”(8월 16일)’
지리산 자락 산청으로 들어온 남부군이 이후 이동한 경로는 지금 산악인들에게 ‘달뜨기능선 코스’로 잘 알려진 웅석봉-감투봉-이방산을 거쳐 시천면 덕산(사리絲里)으로 이어지는 산길이다. 남부군은 덕산 장터 전투 등을 치르며 지리산 자락으로 다가가는데, 바로 신천초등학교 인근의 곡점 개울가에서 하룻밤을 보낸다. 다음날 오후, 심한 위장병과 각기병을 앓고 있던 이태는 부상병들을 호송하는 책임을 맡고, 부대를 떠나 거림골 ‘환자 트’로 들어서게 된다. ‘거림골로 들어서며 두 개의 물줄기 중 오른쪽으로 향하였다’고 하니, 지금의 거림계곡이 아닌 도장골로 들어선 듯하다. 이렇게 해서 이태가 처음으로 지리산 자락으로 들어서는 덕산-곡점-거림으로의 동선(動線)이 이루어진다.

그후 거림골의 ‘환자 트’에서 나온 이태는 수많은 지리산의 산줄기와 골짜기를 넘나들고, 멀리 곡성까지 진출하는 등 빨치산 활동을 하게 되며, 그해 10월 중순 달궁골에 은신하던 남부군은 토벌대의 공격을 받고 다시 지리산 자락을 전전하게 된다. 그리고는 11월 하순에 학동골(하동 청학동 도인촌 골짜기)에 자리를 잡는다. 그렇게 그들은 ‘엄숙한 계절’, 지리산에서의 첫겨울을 맞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1951년 12월 동계대공세(작전명 : 쥐잡기 작전) 때에 남부군은 궤멸적 타격을 입게 되고, 그 후 100여 명도 채 안 되는 생존 빨치산들은 토벌대를 피해가며 몸서리치는 굶주림과 동상을 견디면서 겨울을 보내게 된다. 이태는 우여곡절 끝에 문춘 참모(편대장)와 함께 52년 1월 거림골 ‘무기고 트’에 은신한다. 남부군이 비상선으로 자주 이용했다고 하는 곳으로, 이태는 1951년 12월 동계 토벌 때에도 이곳으로 도주를 하였던 적이 있다. 이곳에서 죽음이 바로 눈앞에 보이는 절체절명의 상황을 모면한 이태 일행은 다시 남부능선 삼신봉으로 이동하였다가 봄이 올 무렵에 지리산 주능선에서 조금 비껴있는 주산 아래 ‘고운동’으로 이동하여 숨어 지낸다. 반천마을, 배바위, 산청양수발전소 상부댐이 있는 바로 그 골짜기이다. 3월 중순의 어느 봄날, 문춘 참모의 지시로 다시 거림골 무기고 트의 상황을 살펴보러 가던 이태는 결국 일행과 헤어지며, 중대한 심경의 변화를 일으키게 된다.  ‘인간이 사는 세계로’ 귀환을 생각하게 된 것이다. 1592년 3월 19일, 곡점 아래 외공마을 가는 길에서 토벌대에게 투항하듯 붙잡히게 되는 것이다.
ㅡㅡㅡ조용섭의 지리산이야기 <27>거림골 가는 길
중에서


북해도교에서 천팔교 세석교로 오를 거다.


거림길은 여러 가지로  편하게 오를 수 있도록 많이 보수되었다.


거림계곡. 거림마을과 세석대피소로 이어지는 등산로 상에 있는 '천팔교'
계곡 풍경은
거림마을에서 약 3km 조금 못미친 지점에 .


남 쌤과 거림골의 급한 오름하고 자주 쉬었던 곳은 의자도 놓이고 이렇게 정비되어 있었다


앞이 터이기 시작하다.
남부능선과 외삼신봉, 삼신봉, 내삼신봉이 한눈에 들어왔다.


3Km 지나 보여준 남부능선과  좌끝 외삼신봉과 우측 뒤로  백운산과 억불봉이라고



*거림길은 03 의신에서 올라오는 길은 02



음양수 의신 청학동 가는 사거리와 분취


용담 (과남풀?)과 투구


세석에  오후 3시 도착해 제일 좋은 곳으로 방부터 배정받고
저녁 일찍 먹고  
좌고대 둘러보고
영신대 일몰 찍었다.

혹 하고 가져온 오리훈제가 중산에서 일찍 먹은  아침 허기를 채워주었다.
(햇반 일미무침 마늘쫑 참치김치찌개 김 오리훈제)


세석대피소는 텅텅 비워있다가 어두워지니 북새통이다
일찍 와서 저녁을  해 먹고 일몰 찍은 것은 현명한 선택이었다


촛대봉과 시루봉(장군봉)


영신봉 아래서 본 서북능


내 뒤로는 영신사지


하얀  구절초와 쑥부쟁이가 세석 주위에 지천으로




추강암(秋江巖)

추강 남효온 선생이 올라서 좌고대를 감상한 바위를 일컫는다.

<추강 남효온_지리산일과 1487년>
나는 가섭전 뒤쪽에서 나뭇가지를 부여잡고 산의 한 봉우리를 올랐는데, 좌고대(坐高臺)라고 하였다. 거기에는 상, 중, 하 3층이 있었는데 나는 중층까지 올라가서 멈추었는데 심신이 놀라고 두근거려 더 이상 올라갈 수 없었다. 대의 뒤에는 위험한 바위가 하나 있었는데 좌고대보다 더 높았다. 나는 그 바위에 올라 좌고대 주위를 둘러보았는데, 기이한 풍경이었다. 의문은 좌고대 아래에 앉아서 두려워하면서 더 이상 올라오지 못하였다.



좌고대(坐高臺)

영신봉 서쪽 해발 1530m 지점에 위치.
전체가 3단으로 이뤄져 있으며 1단은 둥글고, 2단은 하늘 높이 솟아있고, 3단은 판석으로 2단 위에 밥상처럼 평평하게 올려져있고, 높이는 10m쯤 됩니다.
이곳에 올라 소원을 빌면 이루워진다고. 위험하니

1. 1463년 8월 이륙 선생의 유지리산록

뒤쪽의 봉우리에는 기이한 바위가 돛대처럼 솟아 있는데 북쪽으로 만 길이나 되는 벼랑에 맞닿아 있고 상처럼 생긴 돌을 그 위에 또 이고서 반야봉을 향해 조금 기울어져 있다. 부여잡고 올라 사방을 향해 절하는 자는 근기가 잘 잡혀 있다고 여겨지는데 해낼 수 있는 자는 천 명 중에 한 두 명이 있을까 말까할 정도이다.



2. 1472년 김종직 선생의 유두류록

○ 8월 17일, 신사일<중략> 가섭전(迦葉殿)의 북쪽 봉우리에는 두 바위가 우뚝 솟아 있는데, 이른바 좌고대라는 것이다. 그 중 하나는 밑은 둥글게 서리었고 위는 뾰족한 데다 꼭대기에 네모난 돌이 얹혀 져서 그 넓이가 겨우 한 자 정도였는데, 승려의 말에 의하면, 그 위에 올라가서 예불(禮佛)을 하는 자가 있으면 증과(證果)를 얻는다고 한다. 이 때 종자인 옥곤(玉崑)과 염정(廉丁)은 능란히 올라가 예배를 하므로, 내가 절에서 그들을 바라보고는 급히 사람을 보내서 꾸짖어 중지하게 하였다.



3. 1487년 남효온 선생의 지리산일과

○ 10월 정묘일 <중략> 나는 가섭전 뒤쪽에서 나뭇가지를 부여잡고 산의 한 봉우리를 올랐는데, 좌고대(坐高臺)라고 하였다. 거기에는 상, 중, 하 3층이 있었는데 나는 중층까지 올라가서 멈추었는데 심신이 놀라고 두근거려 더 이상 올라갈 수 없었다. 대의 뒤에는 위험한 바위가 하나 있었는데 좌고대보다 더 높았다. 나는 그 바위에 올라 좌고대 주위를 둘러보았는데, 기이한 풍경이었다. 의문은 좌고대 아래에 앉아서 두려워하면서 더 이상 올라오지 못하였다. 이 날 서쪽 방면은 전날보다 훨씬 청명하여, 서해와 계룡산 등의 여러 산을 두루 분별할 수 있었다.



4. 1489년 김일손 선생의 속두류록

○ 4월 24일, 임자일. 영신사(靈神寺)에서 묵었는데, 이 절 앞에는 창불대가 있고 뒤에는 좌고대가 있는데, 천 길이나 솟아 있어 올라가면 눈으로 먼 곳까지 바라볼 수 있었다. 동쪽에는 영계(靈溪)가 있는데, 대나무 홈통을 따라 물이 흘러들었고 서쪽에는 옥청수(玉淸水)가 있는데, 매가 마시는 물이라고 승려가 말하였다. 북쪽에는 석가섭상이 있었다. 당 안에는 찬(贊)이 적힌 가섭도(伽葉圖)가 있는데, 비해당의 삼절(三絶)이었다. 연기에 그을리고 비에 젖은 흔적이 있으나 이 진귀한 보물이 빈산에 버려진 것을 안타깝게 여겨 가져가려 하였다. 그러자 백욱이 말하기를, “사가(私家)에 사사로이 소장하는 것이, (어찌)명산에 공적으로 보관해두고 안목을 갖춘 사람들이 유람하며 감상하게 하는 것만 하겠습니까?”라고 하여 가져가지 않았다.



5. 1611년 유몽인 선생의 유두류산록

○ 4월 5일 갑술일.<중략> 이어 만 길이나 되는 푸른 절벽을 내려가 영신암(靈神菴)에 이르렀는데, 여러 봉우리가 안쪽을 향해 빙 둘러서 있는 것이 마치 서로 마주보고 읍을 하는 형상이었다. 비로봉은 동쪽에 있고, 좌고대는 북쪽에 우뚝 솟아있고, 아리왕탑(阿里王塔)은 서쪽에 서 있고, 가섭대(迦葉臺)는 뒤에 있었다.


ㅡㅡㅡㅡㅡㅡ도솔산인님의 좌고대 관련자료


퍼 온


또 오르지 못하고 결국 시간이 늦어 가까이 있는 운장대도.



영신봉,靈神峰
- 지리산 영신봉은 높이 1,651.9m로 백두대간 낙남정맥의 출발점이다.
서쪽으로 칠선봉[1,576m]·삼각고지[1,470m], 동쪽으로 촛대봉[1,703.7m]·천왕봉[1,915m], 남쪽으로 삼신봉[1,284m]과 이어지는 주요 능선들이 영신봉에서 갈라지며, 남쪽 비탈면에 산청군 시천면 거림골, 하동군 화개면 큰세개골·대성계곡, 북쪽 비탈면에 함양군 마천면의 한신계곡이 있다.


영신대 일몰
ㅡ 세석 올라오면서 만난 진사님과 빨간 옷을 입고 일몰 담고 있는 사람이 있어

환희다!!!


얇은 패딩이 제격이었다
세석 도착하니 바로 추위를  느꼈다.


진사님에게서 눈치챈 영신봉  멋진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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